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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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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만난 할아버지
2014년 04월 04일 14시 57분  조회:3390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저승에서 만난 할아버지

 
김희수

 
 
수돌이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 세상에서 더는 살고싶지 않았다. 극도의 절망에 빠진 그는 어느날밤, 독약을 먹고 자리에 누워 죽기를 기다렸다.
황천길에서 그는 힘들이지 않고 저승에 떨어졌다. 참 이상했다. 머리를 들어보니 대청에 앉아있는 염라대왕이 바로 그가 일곱살나던 해에 세상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넌 누군데 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거냐?”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의 손자 수돌입니다!”
“네가 수돌이라구?  허허허, 네가 벌써 어른이 됐구나! 몇살이냐?”
“서른하고도 세살을 더 먹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젊은 나이에 이곳에 왔느냐?”
“인간세상에서는 살 재미가 없었습니다.”
“밝은 세상이 싫어서 이 어두운 세상으로 오다니? 무슨 말못할 고충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네가 이렇게 떠나오면 인간세상에 남아있는 네 애비에미는 얼마나 속타하겠으며 네 안해와 자식들은 누굴 믿고 살아간단말이냐?”
“제가 이렇게 죽으면 아버지, 어머니는 시름을 덜겁니다. 그리고 전 미혼이여서 안해도 자식도 없습니다.”
“뭐라구? 서른살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다니! 그럼 약혼한 녀자라도 있겠지?”
“장모님 배속에나 있겠는지요.”
“보아하니 넌 이 할배를 닮아 키도 구척이고 생김새도 의젓한데 아직 장가를 안간걸 보니 눈이 너무 높아 어지간한 처녀들은 눈에 차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장가를 안간게 아니라 못간겁니다. 저한테 시집오자는 녀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라소니 같은 녀석! 서른살이 넘도록 녀자 하나 나꾸지 못한단말이냐? 네 이 할아버지는 스무살전에 벌써 시집오자는 녀자들이 너무 많아서 누굴 결혼상대로 정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맸단말이다. 그리고 네 애비도 총각때 네 에미 말고도 시집오자는 녀자가 수두룩했단 말이다. 그런데 넌 조상님들이 부끄럽게 서른살이 넘도록 장가를 못가다니!”
“할아버지,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마을엔 처녀라곤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처녀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세상을 뜨던 그해까지만 해도 네 또래의 계집애들과 아래웃또래의 계집애들로 마을은 떠들썩했는데 그 숱한 계집애들이 모두 어딜 갔단말이냐?”
“모두 도시나 외국으로 시집을 갔거나 돈벌이를 떠납답니다.”
“미친년들이구나! 농사는 안짓고 쯧쯧…그러면 이웃마을의 처녀를 데려오면 될게 아니냐?”
“이웃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남북 어디나 시골엔 처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말고도 장가 못간 로총각들이 많겠구나.”
“부지기수입니다. 전 그래도 로총각중에서 어린축에 속합니다. 근식형이랑 성주형이랑 만철형이랑 무도 마흔살이 넘도록 녀자 손목도 잡아보지 못한 처지입니다. 할아버지도 아들 5형제를 낳았다고 뽐내던 살구나무집을 알겁니다. 그집 막내가 저와 동갑이고 맏형이 마흔다섯살인데 그 5형제가 모두 장가를 못가고있답니다.”
“아이구, 기막힌 세상이구나. 그럼 네형 삼돌이도 장가를 못간게 아니냐?”
“삼돌형은 다행히 아이 둘달린 과부한테 장가를 들었습니다.”
“뭐라구? 삼돌이가 어디 병신이라구 과부한테 장가를 든단말이냐? 그것도 아이 둘이나 달린…아이구!”
“그런 자리라도 차려지면 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과부들도 시체를 따라 모두 도시나 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뿐만아니라 가정이 있는 젊은 녀자들도 도시나 외국으로 떠났고 젊은 남성들도 그 뒤를 따르고있습니다.”
“젊은놈들이 모두 떠나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말이냐?”
“농사만 지어 언제 돈을 벌겠습니까? 저와 동갑인 뒤집 일국이는 외국나들이 몇번에 큰돈을 벌더니 꽃 같은 색시를 맞아서 도시아빠트에서 보란듯이 살고있습니다.”
“너희들 시골총각들은 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처녀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모양이구나. 후, 가난이 원쑤구나! 돈이 원쑤구나!”
길게 탄식하던 할아버지는 다시 수돌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너도 돈을 많이 벌면 일국이처럼 색시를 얻을수 있을게 아니냐?”
“돈을 번다는게 어디 식은죽먹긴줄 압니까? 지금 세월에 농사만 지어 번신할수 없고 남들처럼 출국하자해도 뜻대로 안되지. 도시에 들어가 삼륜차를 한해동안 끌어보았지만 먹고나니 남는게 없었습니다. 인젠 사른세살이 됐는데도 녀자의 살맛이 어떤지조차 모르니 무슨 사는 멋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개코같은 인간세상을 떠나서 여기로 온겁니다.”
“이 뼈없는 놈아! 그만한 좌절앞에서 삶의 용기마저 잃다니! 네가 일국이보다 못한게 뭐냐? 넌 일국이보다 더 큰 부자로 될수 있고 일국이보다 더 예쁜 색시를 맞을수 있다는 그런 포부를 품고 노력해보란말이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에게 손오공 같은 신통력도 없는데 무슨수로 부자가 될수 있겠습니까? 제가 벌써 서른하고도 셋인데 이제 돈을 벌어서 어느 천년에 부자가 되겠습니까? 늙어죽을 때 부자가 되여 뭘 하겠습니까? 좋은 세월을 다 놓치고 오금을 못 쓸 때 장가를 가겠습니까? 글쎄 3~5년 고생해서 큰 부자가 될수 있다면 죽을둥살둥 모르고 해보겠습니다만…”
“이 등신같은 놈아! 너처럼 ‘언제면 하늘에서 큰돈이 떨어지겠는가, 언제면 벼락부자가 되겠는가’고 백일몽을 꾸며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다간 40~50살이 되여도 그 모양이요, 60~70살이 되여도 그 꼴일테지. “대부유천 소부유근”이라고 세상에 처음부터 부자가 어디 있겠느냐? 부지런하면 작은 부자는 될터이고 작은 부자가 쌓이면 그게 곧 큰 부자가 도지 않겠느냐!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부지런히 일하여 40~50살에 부자가 되여 장가들면 70~80살이 되도록 외톨이로 늙기보다 낫지 않겠느냐?”
“지당한 말씀입니다.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보니 눈앞이 밝아지고 힘이 막 솟습니다. 그런데 인간세상을 떠난 몸이여서…”
“이제라도 늦지 않다. 네가 분투할 결심만 있다면 인간세상으로 보내주마. 기억해라. 저승에선 총각귀신을 안 받으니 부지런히 돈을 벌어 꼭 장가를 가야 한다는것을!”
염라대왕인 수돌이의 할아버지는 수돌이를 번쩍 들어서 공기돌 던지듯 힘껏 허공중에 올리던졌다. 수돌이는 우물안에서 밖으로 솟구치듯 온몸이 우로 자꾸만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어떤 산꼭대기에 닿았다. 수돌이는 사방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산아래로 허망 굴러떨어지고말았다…
“아앗!”
수돌이는 몽롱한 꿈속에서 깨여났다. 수돌이가 먹은 독약은 가짜였다. 신생한 수돌이는 꿈속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먹을 불끈 틀어쥐였다.
“내 꼭 부지런히 일하여 10년, 늦어도 20년후엔 부자가 되여 보름달처럼 환한 색시를 맞아드릴테야!”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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